영화 "취화선" 은 안견, 김홍도와 함께 조선 3대 거장으로 불리는 오원 장승업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로 임권택 감독의 작품이고 김영동이 음악을 맡았다.
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850년대, 청계천 거지 소굴 근처에서 거지패들에게 죽도록 맞고있던 어린 승업(최종성 분)을 김병문(안성기 분)이 구해주고 승업은 맞은 내력을 설명하며 김선비에게 그림을 그려보인다. 세도정치에 편승하지 않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김선비. 거칠지만 비범한 승업의 실력을 눈여겨보고... 5년만에 재회한 승업(정태우 분)을 엘리트이자 역관 이응헌(한명구 분)에게 소개하는데... 승업에게 진정한 예술가의 자세를 추구할 것을 독려하고 선대의 명화가들처럼 훌륭한 화가가 되라는 뜻에서 오원이라는 호를 지어준 김선비는 승업(최민식 분)의 피드백 역할을 해주는 평생의 조언자였고 그런 승업은 행운아였다. 이응헌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면서 그림의 안목을 키워가는 중 이응헌의 여동생 소운(손예진 분)에게 한눈에 반해버리지만 가슴 설레는 첫사랑은 소운의 결혼으로 끝나고... 화가로 자리잡기 시작할 무렵 병을 앓던 소운이 죽어가며 자신의 그림을 청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달려가는데.
화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할 즈음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몰락한 양반집안의 딸인 기생 매향(유호정 분)의 생황 연주에 매료된 승업. 매향은 승업이 그려준 그림에 제발을 써넣으며 아스라한 인연을 맺어나간다. 계속되는 천주교 박해로 두 번의 이별과 재회를 하고. 켜켜히 쌓인 정과 연민, 승업의 세계를 공감하고 유일한 여인이자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는 고매한 사랑. 아무도 그를 곁에 붙잡아둘 수 없었다. 임금의 어명도 그를 막을 수는 없었다. 오로지 술에 취해야 흥이 나고 그 흥에 취해서야 신명나게 붓을 놀리는 신기. 술병을 들고 세상을 조롱하는 듯한 표정의 원숭이를 그리고 자신의 필력을 확인하지만... 화명이 높아갈 수록 변환점을 찾아야한다는 강박관념에 괴로워하고 한계를 넘으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날, 온몸의 기가 붓을 타고 흐르는 경험을 한다. 외부의 소음에도 불구하고 또렷하게 자신의 붓소리를 듣게 되고.
매향과의 마지막 재회, 세상과의 마직막 재회. 매향이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찌그덩한 그릇을 보고 승업은 그 안에서 자신이 그토록 도달하고자 하는 경지를 보게 되고 조선의 운명인 듯, 또한 스러져가는 자신의 운명인 듯 그는 홀연히 세상을 등지고 사라져간다. 과연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세상은 어디에 있던 것일까???
수제천(壽齊天)
대표적인 관악합주곡 가운데 하나로 원곡명은 정읍(井邑)이나 고려시대 궁중에서 추던 무고(舞鼓)의 창사인 정읍사를 노래하던 음악이었다. 조선 중기 이후로 노래는 부르지 않고 관악합주로만 전승되어, 현재는 순수 관악합주곡 또는 궁중무용의 반주음악으로 사용되고 있다고는 하나 정읍사에서 유래한 '정읍'은 대악후보의 '정읍'으로 수제천과는 무관한 곡이며, 수제천의 선율은 고악보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그 편성도 '삼현육각' 즉, 궁중의 것이 아니요, '연음기법'또한 원래 궁중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수제천은 민간의 삼현육각이 궁중으로 들어가서 궁중화된 음악으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하다 할 수 있다. “수명이 하늘처럼 영원하기를 기원 한다”는 의미의 제목을 가진 이 음악은 궁중의례와 연회에 사용된 곡으로 궁중연례음악중 관악합주곡의 백미(白眉)다라고 기술할 수 있으며, 그 연원은 현행 수제천의 원조로 볼만한 어떠한 기록이나 악보도 찾을 수 없으므로, 아무리 오래 거슬러올라간다고 할 지라도 조선말, 일제강점기보다 더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제천의 형식은 전체가 4장인데 1 ․ 2 ․ 3장의 마지막 장단에서 피리와 대금이 교대로 유장한 가락을 연주하는 독특한 선율진행 방식인 연음형식으로 되어있다. 연음형식은 음악을 이끌어 가는 피리가 잠시 쉬는 동안 다른 악기들이 그 가락을 이어받아 연주하는 것을 뜻한다. 수제천을 연주하는 악기는 대금․소금․향피리․해금․아쟁․좌고․장구․박 등이다.
대취타(大吹打)
선전관청과 영문에 속한 취타대가 연주하던 행악으로서 임금의 거동, 군대의 행진, 통신사의 행렬 때 취타대들이 연주하였다. 악기편성은 태평소, 나발, 나각 등의 관악기와 징, 용고, 자바라 등의 타악기로 편성되는데 이중에 태평소만이 유일한 선율악기이다. 타악기와 관악기들의 힘찬 연주, 그리고 태평소의 강렬한 음색 등으로 인하여 쾌활하고 늠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취타대에는 ‘집사’가 “등채”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가 오른손으로 등채를 머리 위로 높이 들면서 “명금일하 대취타(鳴金一下 大吹打) 하랍신다(징을 울려 대취타를 시작하라)” 라고 호령하면 음악이 시작된다.
타악기와 관악기들의 힘찬 연주, 그리고 태평소의 강렬한 음색 등으로 인하여 쾌활하고 늠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연주복장은 깃털을 꽂은 관을 쓰고, 노란색 철릭을 입고, 남색 전대를 허리에 매기 때문에 화려한 느낌이 든다.
취타
대취타의 태평소 가락을 장2도 올려서 편곡한 관현합주곡으로서 만파정식지곡(萬波停息之曲)이라고도 한다. 편성악기는 향피리, 대금, 소금, 해금, 가야금, 거문고, 아쟁, 좌고, 장구 등이다. 씩씩하고 힘찬 느낌을 준다.
가곡(歌曲)
가곡의 이지적인 아름다움은 "유유(油油)할손 춘운(春雲)이 창공에 뜨는 것 같고 호호(浩浩)할손 훈풍(薰風)이 들판을 쐬는 것 같다"라는 표현에서 느낄 수 있다.
원래는 만대엽(慢大葉: 느린 노래), 중대엽(中大葉: 중간 속도의 노래), 삭대엽(數大葉: 빠른 속도의 노래)의 세 종류가 있었으나 지금은 삭대엽만이 여러 파생곡을 낳아 불려지고 있다. 가곡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만대엽이 처음 보이는 악보는 안상의 '금합자보'이다. 그리고 1610년에 만들어진 양덕수의 '양금신보'에는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등이 고려시대의 악곡인 정과정 삼기곡(鄭瓜亭 三機曲)에서 온 것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가곡의 형식은 3장 형식의 시조를 5장 형식으로 확대하여 전주격인 대여음(大餘音)과 간주격인 중여음(中餘音)이 있다. 각각의 장단은 16박 장단과 10박 장단 종류가 있는데, 10박 장단은 16박 장단에서 빈박, 즉 장구를 치지 않은 박을 없앤 장단이라 할 수 있다. 10박 장단은 편(編)의 곡들에 쓰이는 장단이어서 편장단(編長短)이라고 한다. 가곡은 창자(唱者)에 따라 남창(男唱)과 여창(女唱)으로 구분되어 남창가곡 26곡과 여창가곡 15곡이 불려지고 있으며, 조(調)에 따라 우조(羽調)와 계면조(界面調)로 구분된다.
반주악기는 거문고, 가야금, 세피리, 대금, 해금, 양금, 단소, 장구 단잽이의 세악 편성의 악기들로 이루어졌다. 이 가곡은 시조시에 담겨진 훌륭한 사상과 정서가 깊고 웅장하며 너그러운 가곡창의 발성법에 얹어져 민족 정신의 정수가 담긴 예술로서 그 가치를 빛내고 있다. 가곡, 가사, 시조를 정악의 성악이라하여 정가(正歌)라고도 불린다.
"홍원기 예술세계"에서 옮김
가곡은 본래 가사의 전달보다는 심연에서 내는 은은한 곡조를 들을 수 있어야 그 깊은 멋을 느낄 수 있다. 이 음악을 가리켜 정가(正歌)라하여 민요나 속요와 차분화 시킨것도 그 이유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가곡은 엄격히 절제된 소리이기는 하나 한없이 깊고 순수한 예술이다. 마치 모든 것을 잊은 양, 모든 것을 버린 양 끝없이 빠져들 수 있는 마음의 음악이다.
"조순자 여창 가곡 전집"에서 옮김
1. 가곡의 유래
가곡의 유래 또는 기원설은 청구영언의 곡목에 중대엽 계열의 초중대엽, 이중, 삼중대엽,북전 등 현존되지 않은 곡목이라든지 고려 말엽의 우국 애국지신들의 시조(창곡의 사설)들을 볼적에, 이조초기에는가곡이 많지는 않았지만, 창적으로 정립이 되었다고 추측된다.
그 후, 세종조에 모든 문화 예술의 황금시기를 만나, 국악도 성악부문이나 기악부문에 기초가 확립되었고 또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을 치른후의 소강시대인 숙 경 영조 백년간의 가창 왕성시기에 청구영언 가집의 편찬자이며 가곡의 대가인 경정산 가단의 금천택과 한 시대(삼십년 후기) 해동가요(가집)찬자이며 노가제 가단의 금수장 등의 가곡 보급사업(가사, 시조창도 아울러),그리고 백년후인 고종년간에 가곡원류를 찬한 분이며, 가곡의 대가인 박효관 안민영의 가곡 부흥사업으로 오늘날까지 오백여년간 명맥을 유지하여 온 방대한 량과, 가장 오랜 연조를 자랑하는 유래를 갖고 있다.
2. 가곡의 형식
가곡의 기본적 구조는 간단히 말하여 오장형식에 시조시를 얹어 부르는 창이다. 시조시가 정격이건 파격이건 한수를 창으로 처리하는 데는 초장 이장 삼장 사장 오장을 마쳐야 하는데, 삼장과 사장 사이에 간주격인 중여음과 오장 마치고 나서 후주격인 대여음을 마치고 나면 또 다시 반복되는 형식이다. 初章 二章 三章 中餘音 四章 五章 大餘音 이러한 순서가 원칙적이다.
중여음 때는 창은 쉬고 관현악기의 간주가 되겠고 대여음 역시 창은 쉬고 다음 가곡의 암시를 일러 주는 관현악기의 신호후주 될것이다. 이 후주가 오장을 마치고 난 다음 차례가 되기도 하지만 중간가곡 순서에 가서는 전주격인 위치에로 전환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大餘音 初章 二章 三章 中餘音 四章 五章 이러한 순서로 전환 된다는 것이다. 歌曲원류의 매화잠 장단에 初章 二章 三章 중념 四章 五章 대념에 있어서 中念은 중여음 大念은 대여음으로 간주 후주격이나 다름 아닌 것으로 본다
3. 창제
남창의 가곡과 녀창의 가곡, 두 종류가 있다. 남창가곡은 창의 사설이 남성적으로 된것이고, 여창가곡은 창의 사설이 여성적으로 된것으로 우선 구별된다.
남창가곡은 순수한 육성으로 창을 하게 되어있고 여창가곡은 육성과 속청(세성)이 어울려 가면서 창이 진행되게 되어 있다.
4. 가곡의 정의
청구영언: 조선 영조 때의 가인(歌人) 남파(南坡) 김천택(金天澤)이 고려 말엽부터 편찬 당시까지의 여러 사람의 시조를 모아 1728년(영조 4)에 엮은 고시조집.
靑丘永言 서문에 '古之歌者는 必用詩니 文之者 爲詩요 詩而 被之管絃者 爲歌라 歌與詩는 固一道也라' '歌 永言 詩 言志...'등을 한번 볼 때 歌 곧 노래는 永言과 被之管絃이 요소임을 알 수 있다.
노래(唱)하는 데는 시가 창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영언을 풀이하자면, 글자 그대로 '말을 길게 늘인다'는 것이니, 동양의 가창은 그것이 특색이며 인상적인 것이 노래(歌)라는 뜻이 되는 것이며 피지관현은 관현악기에 입힌다는 뜻이니 제도화된 반주가 구비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중복되는 말이지만, 노래 곧 歌曲은 말을 길게 창하는 것이 인상적이며 반드시 관현악기의 반주가 요소로 되어있다. 그러면 永言 피지관현 아닌 것 또는 영언이면서 피지관현은 구비 안되었다면 정의상 "노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노래 아니면 무엇이냐 반문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국악성악에서는 소리라고 규정지어 내려 온 것이다.
소리의 정의는 무엇일까? 위에서 설명한 '永言' 被之管絃 겸비가 안된 것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다. 장구나 북이나 꽹과리 같은 것도 악기는 악기지만 국악계에서 절주악기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피지관현으로는 인정 안 된다.
가사나 시조는 영언 체질이 다분히 있기는 하나, 원래 반주악곡요소로 작곡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엄격히 따져서 관악만의 반주는 한다해도 수성가락으로 인정) '노래'라는 명칭은 못 붙인다. 억울하다면 '준 노래'라고 부를 수는 있겠다.
요즘에 와서 경서도창이나 남도창을 창할 적에, 수성가락으로 관현반주를 한다 하나, 노래라는 호칭은 원칙으로 보아 붙이기 어렵다.
경서도창을 경서도 소리, 남도창을 남도소리, 범패를 인도소리, 춘향전 심청가 적벽가 등의 판소리 호칭은 아직도 쓰이고 있는 것이다. 과거에 경서도 잡가니 남도잡가니 하여 왔던 것은 , 정가인 가곡 가사 시조 등의 정의상의 대칭일 것 같고, 소리라는 데서 기인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청구영언의 청구는 우리나라의 고칭이며, 영언은 가곡(창)의 창사(시조시)를 모아 놓은 가집을 말한다.
歌曲에서의 男唱이나 女唱이나 시조시 한자 가지고 길건 짧건 흔히 오박 이상을 가락에 얹어 이끌어나가는 것이 허다해서, 조용히 귀기울여 듣지 않으면, 확실한 글자를 파악하기 어렵다. 비단 가곡 뿐이 아니다. 歌曲에 비해서 간단한 시조같은 창도 永言 색채로 보아 긴 인상을 갖게 되고 字句의 발음을 확실히 들어야 알게 되는 唱이기 때문에 '말을 길게한' 뜻의 永言이란 문자가 쓰이게 된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歌曲은 일정한 音律에 맞게 내는 唱이며, 또한 관현반주가 곁들여 있는 관계로 唱者가 자기 목청 爲主로 맘대로 낼 수 없게 되니 唱法이 소리 계통과 다른 점이라 하겠다. '피지관현'이란 唱을 견제도하고 조화를 이루는 사명을 갖기도 한 것이다.
예1) 남창 가곡 우조 초수대엽 ‘동창이’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놈은 상기아니 일었느냐
재 넘어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나니
예2) 남창 가곡 ‘언락’
벽사창이 어룬 어룬 커늘 님만 여겨 펄떡 뛰어 나가보니
님은 아니 오고 명월이 만정한데 벽오동 젖은 잎에
봉황이 와서 깃 다듬는 그림자로다
마초아 밤일세 만정 남 우일번 하여라
예3) 여창 가곡 평조 ‘우락’
초장 : 바람은 지동치듯 불고
2장 : 궂인 비는 붓듯이 온다
3장 : 눈 정에 거룬 임을 오늘 밤 서로 만나자 하고
판첩 쳐서 맹서 받았더니 이 풍우 중에 제 어이 오리
4장 : 진실로
5장 : 오기곳 오량이면 연분인가 하노라
시조(時調)
시조의 유래와 종류
먼저 시조의 유래에 대해서인데 시조창이 예외 없이 가곡(歌曲)에서 부르는 시조시를 사용하기 때문에 그 기원이 오랜 것 같아도 그건 아니고, 시조창의 형식이 고정되기는 조선조 영조(英祖) 때 가객(歌客) 이세춘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영조 때 학자요 문인인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의 석북집(石北集) 관서악부조(關西樂府條)에 [一般時調長短, 來自長安李世春(일반시조장단, 래자장안이세춘)]이란 시구(詩句)로 비로서 시조라는 명칭과 그 창시자가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일반 시조에 장단을 안배한 것은 장안으로부터 온 이세춘에게서 비롯한다.]는 것인 바 시조의 발생을 대개 영조 때로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조의 최초 악보로서는 <구라철사금보(歐邏鐵絲琴譜)>에 시조라는 곡명으로 양금보가 전하고 있다. 구라철사금보는 정조 때 지어진 양금 악보이다.
시조의 종류에 대하여는 사람에 따라 나누는 방법도 다르고 따라서 가지 수도 약간 들고 나지만 대개 다음과 같이 보는 것이 지극히 타당할 것 같다.
영조 때 이세춘이 비롯했다는 시조창은 물론 오늘의 평시조에 해당하고, 그 구라철사금보의 소수의 시조보도 평시조의 악보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시조창도 그간 긴 세월을 지나오는 동안 최초의 원곡 이외에 몇 개의 변화형이 파생하여 현재에 보듯 하는 10여 종을 이루고 있다.
평시조는 여러 가지 시조창의 근본이자 고형(古形)으로, 시조시 45자 내외의 단형(短形) 시조를 부르던 것이 그후 많은 변화형이 발생함으로 말미암아 그 시조란 명칭은 시조창의 범칭이 되고, 최초의 단일곡이던 시조창은 기본 시조 또는 비교적 평탄한 시조라는 뜻에서 평시조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평시조에 있어서도 지역적 배경으로 경제(京制)와 향제(鄕制)의 분별은 있으니 이것은 가곡이나 가사와는 또 다른 시조의 지방적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서울 중심의 경제의 평시조에 있어서는 그 중간 둘째 장단, 넷째 장단, 넷째 박, 다섯째 박에서, 그리고 동장 첫장단, 첫 박, 둘째 박, 셋째 박에 높은 속소리를 쓰고 있는데 반하여 지방의 향제에 있어서는 경제에서 속소리로 내는 목을 전혀 속소리를 쓰지 않고 평성(平聲)으로 대이는 점이 크게 다르고 장단에 있어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먼저 경제 평시조의 장단을 보면 초장 5박-8박-8박-5박-8박, 중장 5박-8박-8박-5박-8박, 종장 5박-8박-8박-5박-8박(실은 1박), 실박수(實拍數) 87박이요, 다음 향제 평시조의 장단은 초장 5박-8박-8박-8박-5박, 중장 5박-8박-8박-8박-5박, 종장 5박-8박-8박(실은 6박)으로 실박수는 역시 87박으로 떨어지고 있어 장단의 내용의 차이는 있으나 실제의 박수는 양쪽이 다 같은 것은 퍽 재미있는 사실이다.
중허리시조의 이름은 가곡의 중허리 즉 중거(中擧)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시조에 있어서의 중허리시조의 그 명칭과 형식을 습용(襲用:계승하여 쓰다)한 것으로 믿어진다. 전체적인 곡태(曲態)는 경제 평시조와 거의 같게 되었으나 다만 초장 셋째 장단 첫박에서 넷째 박까지를 속소리로 들어서 부르는 것이 다를 뿐이다. 중허리의 이름은 그래서 붙여진 것이다.
지름시조는 시조창의 첫머리를 고음(高音)으로 질러 내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가곡의 두거(頭擧) 또는 삼수대엽(三數大葉)에 비길 수가 있다. 이주환은 이 지름시조를 일러 특히 평(平)지름시조로 명명하여 여창지름시조, 사설지름시조 혹은 우조지름시조와 구별하고 있으나 필자의 의견으로는 의도는 충분히 알겠으나 이름 자체는 잘된 이름이라고 좌단(左袒)하기가 어려운 입장이다. 평과 지름은 아예 상반되는 개념에 속하는데 그를 묶어서 평지름시조라 부르는 것은 너무 무리인 것 같고 그래서 무의미하기까지 하다는 견해이다. 그러면서도 그가 평시조로 부를 수 있는 단형시조로서 되도록 그 내용이 장엄하고 호기롭고 또는 지극히 통분한 것으로 초장만을 높게 부르고 중장과 종장은 평시조와 같이 부르는 창법 이라는 정의는 요령을 얻어 간결하면서 매우 함축 있는 풀이라고 감심하고 있다.
여창지름시조는 이름 그대로 여자의 목을 위한 여성(女聲)의 지름시조가 되는데, 대개 남자의 지름시조와 같이 고음으로 질러 내지 않고 초장 둘째 장단 첫박에서부터 셋째 장단 끝박까지를 높은 목으로 들어 내는 것이 다르다. 규원(閨怨)의 애절한 내용의 사설을 부르기에 적합한 여성적인 창법이라고 이주환이 갈파하였는데 과연 정곡을 찌른 평언이라고 생각한다.
사설(辭說)시조는 비교적 자수(字數)가 많은 이른바 장형(長形)시조를 장단이나 한배를 늘이지 않고 평시조의 규격에 얹어 부르는 것을 특히 이르고, 장형시조와 단형시조의 중간을 걷는 시조시를 부르는 것을 따로 반(半)사설시조라고 일컫는다. 사설시조로 부르기에 가장 적합한 자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초장 첫 장단 8자 둘째 장단 9자 셋째 장단 10자 넷째 장단 8자 중장 첫 장단 6자 둘째 장단 17자 셋째 장단 19자 넷째 장단 8자 종장 첫 장단 6자 둘째 장단 16자 셋째 장단 7자
이로써 보면 초장은 42자, 중장은 53자, 종장은 39자로 된 것이 가장 호적한 것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건 이주환의 사설시조 30수를 평균한 자수에 불과하고 각 장단에 있어 2, 3자의 가감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태도를 밝히고 있었다. 지름시조는 경판(京版) 경제를 이르고, 사설시조는 남도에서도 그 완조(完調).완제(完制)를 일러 전라도를 쳤는데, 기실 사설시조는 향제의 멋있고 자랑스런 창법임에 아무도 이론이 없을 것이다.
사설지름시조가 있다. 한 말로 시조, 시조창이라고 하여도 시조창의 정도를 걷는 본격(本格)의 그것이 있고, 한편 시조창의 격식을 많이 이탈한 이른바 변격(變格)의 시조가 있다. 전자에 속하는 것에 평시조. 지름시조. 여창지름시조. 사설시조 등을 들 수 있고,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사설지름시조.휘모리시조 갈은 것을 들 수 있다. 사설지름시조란, 말이 많은 지름시조란 뜻으로, 대개 초장 첫머리를 지름시조로 질러 내되, 초장 중간 또는 중장 중간에서 잡가조의 빠른 3박자로 부르다가 종장은 역시 평시조 종장과 같이 종결하는 창조(唱調)이다. 사설지름시조를 달리 수잡가(首雜歌)로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시조 편이기보다 잡가에 가까운 것이다.
끝으로 우조(羽調)와 우조지름시조란 것이 있다. 시조창의 음조는 모두 계면조(界面調)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우조시조, 우조지름시조는 함께, 우조 즉 평조(平調) 음조로 된 것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일부 지역에서 불리었는데, 그리 보편화된 시조는 못된다고 보아야 옳다.
정리하자면, 시조시(時調詩)를 가사로 노래하는 음악으로 3장 형식이다. 가곡에 비해 노래 길이가 짧으며 관현반주를 갖추어 노래하는 가곡과 달리 장구와 대금 등의 간단한 악기 반주로 노래한다. 지역의 특성에 따라 경제, 영제, 완제, 내포제 등으로 나뉜다. 시조의 종류로는 평시조, 사설시조, 지름시조 등이 있다.
예1) 여창 평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 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가곡과 시조의 비교
가곡 | 시조 |
5장 | 3장 |
줄풍류반주(단소,대금,세피리,해금,가야금,거문고,양금,장구) | 대금, 장구 반주 |
우조, 계면조 | 계면조 |
청성자진한잎: 청성곡 (淸聲曲)
남녀병창으로 부르는 태평가의 반주음악을 변주하여 대금이나 단소로 연주한 독주곡이다.
일명 요천순일지곡 이라고도 하며 <청성>의 청(淸)은 맑다는 말이 아니고 높다는 듯이다.
가곡의 이삭대엽을 변조한 태평가를 2도 높인다음, 다시 옥타브 위로 올린 후 복잡한 꾸밈음을 첨가하거나 특정음을 연장하여 변주시킨 곡이다.
<자진한잎>은 빠르다는 '자진'과 악곡=큰 잎사귀라는 뜻의 '한잎'이 모인 단어이다.
*대금독주[청성곡]의 음악적 특징*은 소리가 맑고 높은 음역으로 이루어지며 가곡처럼 장단이란 틀에 얽매이지 않고 무정형식적이며 뻗는 소리는 주자 임의에 맡겨 신축 가변성이 높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대금이나 단소 등의 관악기에서 낼 수 있는 길게 뻗는 소리와 관악기 특유의 시김새가 잘 어우려져 맑고 유창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며 장단이나 고정된 선율에 얽매이지 않고 연주자의 감정에 따라 자유롭게 연주한다."[김용진]
"수정처럼 해맑고 가슴이 시리도록 투명한 게 한국의 가을이다. 한국의 가을빛처럼 청청하고도 유순한 가락이 있어 만인의 심금을 휘어잡는 명곡이 있으니 바로 청성자진한잎이 그것이다."[한명희]
"대금 소리는, 늘상 내 가슴에, 청상과부의 설움처럼 얹혀 온다. 낮게 울릴 때면 부드럽고 깊은 맛이 나다가도 높을때면 강렬한 호소력을 지닌다. 보통 소리에선 맑고 단아한 울림이 온다. 대금엔, 또한 한번 빠져 들면 벗어날 수 없는,
아편같은 요소가 있다."[안성우]
자진한잎이란 가곡의 반주음악을 노래없이 기악으로만 연주하는 음악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사관풍류라고도 하며 음량이 큰 향피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대풍류 성격을 가지며 삼현육각의 편성으로 연주한다.
영산회상(靈山會上)
영산회상이 우리 음악사에 있어 언제부터 연주되기 시작되었는지 분명치 않으나 불교음악이 세속음악으로 변화한 음악이다. 15세기의 음악을 기록한『대악후보』와 1493년에 만들어진『악학궤범』에 기록된 영산회상은 처음에는 '영산회상불보살(靈山會相彿菩薩)'이라는 불교가사를 관현악 반주로 노래하던 불교음악이었으며, 또한 향악정재의 반주 음악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이와같이 본래 불교의 성악곡이던 영산회상이 중종(1506-1544)때 이르면 불교가사가 '사만년사'로 개작되고 세속화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가사는 없어지고 순 기악곡으로 변화한다. 그 예로 19세기 초 악보인『유예지』에는 가사는 없고 기악곡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며 그로부터 파생된 곡들이 포함되어 있다. 현행 영산회상에는 가사로 노래하던 상령산(上靈山)에서 파생한 중령산(中靈山), 세령산(細靈山), 가락덜이가 있고 후에 추가된 삼현(三絃)도드리와 그의 변주곡인 하현(下絃)도드리 그리고 불교노래의 하나인 염불도드리가 있으며, 또 불교음악과는 무관한 타령(打令), 군악(軍樂)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와같이 영산회상은 상령산 한곡에서 비롯하였으나 그로부터 중령산 등이 파생되고 새로운 곡이 결합하며서 전체 9곡에 이르는 모음곡을 완성하였다. 영산회상은 3가지가 있는데 악기편성, 선율형태, 연주방법 등에 따라 줄풍류에 드는 거문고 중심의 현악영산회상, 이 곡을 4도 아래로 이조한 평조회상, 관현악곡인 관악영산회상 등의 세가지가 있다.
그리고 현악영산회상은 도드리, 천년만세 등과 결합하여 여러가지 형태로 연주된다.
가. 현악영산회상
거문고․가야금․해금․세피리․대금․양금․단소․장구 등의 실내악 편성으로 연주한다. 거문고 같은 현악기위주로 연주한다고 하여 거문고회상이라고 하며 딴 이름으로 중광지곡(重光之曲)이라고도 한다. 또한 현악이라는 이름을 빼고 「영산회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거문고와 가야금 같은 현악기 소리를 드러내주기 위하여 피리는 음량이 작은 세피리를 사용하고, 대금은 저취와 평취로 연주하며, 장구도 채편의 변죽을 친다. 따라서 각 악기의 섬세한 음색이 살아나서 국악실내악의 정수를 느끼기에 알맞다. 이 곡은 상령산․중령산․세령산․가락덜이․삼현도드리․하현도드리․염불도드리․타령․군악의 9곡으로 되어있으며 전체 연주시간은 55분 내외이다.
느리게 시작하는 상령산으로부터 점차 빨라지는 속도를 취하고 있으며 곡의 분위기는 그윽하고 명상적이다. 특히 단소와 양금 이중주로 듣는 ‘세령산’은 동양란의 단아하고 청초한 모습을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곡이다.
나. 관악영산회상
향피리가 편성되는 합주곡으로서 삼현영산회상, 또는 표정만방지곡이라고도 한다. 악기편성은 대금․향피리․해금․아쟁․좌고․장구 등으로 이루어진다. 현악영산회상과의 차이점으로는 하현도드리가 없는 점, 세피리 대신 향피리를 쓰는점, 대금은 역취를 많이 쓰고, 장구는 채편의 복판을 치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향피리가 주선율을 연주하다가 얼마동안 쉬고 있을 때 대금과 해금 그리고 아쟁 등이 그 뒷가락을 이어서 연주하는 ‘연음’이 있다. 곡의 분위기는 꿋꿋한 관악기의 소리가 시원하며 대풍류 특유의 힘찬 흥겨움을 느끼게 한다.
관악영산회상의 악곡가운데 삼현도드리․염불도드리․타령․군악을 따로 떼어 연주하는 것을 ‘함령지곡’이라고 부르며 ‘상령산’을 독립적으로 연주하는 것을 ‘향당교주’라고 한다. 함령지곡과 향당교주는 정재(呈才)의 반주음악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다. 평조회상
본래의 영산회상을 4도 아래로 낮게 조옮김하여 변화시킨 음악으로서 유초신지곡, 또는 취태평지곡이라고도 부른다. 악기편성은 소금․대금․향피리․해금․거문고․가야금․아쟁․좌고․장구 등이다. 평조회상도 관악영산회상처럼 하현도드리가 없이 8곡으로 되어있다.
곡의 분위기는 대규모의 국악관현악편성의 음향을 느낄 수 있는 곡으로 유려한 선율이 일품이다. 특히 첫곡인 상령산은 대금과 피리의 독주곡으로 많이 연주된다.
천년만세(계면가락 도드리, 양청도드리, 우조가락 도드리)
천년만세(千年萬歲)란 계면 가락 도드리·양청 도드리·우조 가락 도드리를 한데 묶어서 연주할 때 천년만세라고 부르며, 보통 현악 영산회상 끝 곡인 군악에 이어서 연주한다. 계면이니 우조니 하는 명칭은 선법(旋法)을 말하고, 가락은 선율, 즉 멜로디를 말하며, 양청 도드리의 양청(兩淸)은 거문고의 연주 방법에서 붙여진 이름이며, 도드리란 우리말로 되돌아든다는 뜻 즉, 같은 가락이 반복해서 연주된다는 뜻이다.
영산회상을 순서에 따라 상령산에서부터 군악까지 연주하지 않고, 영산회상에 도드리를 곁들여 타는 연주 방법을 별곡(別曲) 또는 정상지곡(呈祥之曲)이라 한다.
음량이 가는 세피리를 쓰며, 현악기를 중심으로 한 줄풍류로, 촉급한 양청을 제외한 두곡의 가락은 매우 청아하며 화려하다.
영산회상은 전통음악의 여러 장르 중에서 기악곡 중 규모가 큰 합주와 독주의 중간에 위치한 실내악곡 그리고 모음곡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곡이다.
특히 영산회상은 궁중으로부터 민간세상의 굿판에 이르기까지 지난 수 세기 동안 쓰여왔다는 점으로 해서 그 수용층이 넓은 음악이다. 또한 (현악)영산회상을 연주했던 연주자들은 거문고 가야금을 담당했던 양반 계층으로부터 피리, 해금, 대금을 연주한 선율악기를 담당했던 계층의 '전문예능인"까지 여러 계층을 포함한다.
과거 국악의 창작이라는 개념은 영산회상의 삼현환입(도드리) 과 하현환입의 관계에서 보듯이, 재래의 곡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수법에 의해서 재미있는 변주방법을 연구하였다는 점이다.
1. 종교음악(불교 성악)의 세속화.
2. 성악곡의 기악곡화: 기악영산회상은 곡의 지주(支柱)인 가사를 잃은 대신 새로 동일한 종지형이란 지주(支柱)를 얻었다. 다시 말하면 영산회상은 성악곡에서 기악곡으로 변함에 따라, 동일한 종지형에 기하여 장으로 구분되어, 새로운 형식을 갖게 되었다.
악학궤범 [ 樂學軌範 ]
9권 3책. 1493년(성종 24) 왕명에 따라 예조판서 성현(成俔)을 비롯하여 유자광(柳子光) ·신말평(申末平) ·박곤(朴棍) ·김복근(金福根) 등이 엮은 악규집(樂規集)이다. 당시 장악원(掌樂院)에 소장된 의궤(儀軌)와 악보(樂譜)가 파손 ·소략(疏略)되고, 세종(世宗) 이후의 성악유법(聲樂遺法)이 결폐(缺廢)되는 감이 있으므로, 이 책을 지어 임금께 바친다고 하였다. 편찬자들 중에서도 성현은 장악원의 제조(提調)를 맡았던 만큼 음악이 따르는 궁중의 전례(典禮)에 실제로 참여하여 음악에 정통하였으므로, 이 책을 편찬함에 있어 중심적인 구실을 하였다.
악학궤범 서문 (樂學軌範 序文)
악이란 하늘에서 나와서 사람에게 붙인 것이요,
허(虛)에서 발하여 자연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니,
사람의 마음으로 하여금 느끼게 하여
혈맥을 뛰게 하고, 정신을 유통케 하는 것이다.
樂也子 出於天而寓於人
發於虛而成於自然
所以使人心感
而動血流通精神也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조선시대 종묘의 제사에 사용되었던 기악과 노래와 무용을 말한다. 종묘제례악에 사용되는 음악인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은 세종 때 만들어졌으나, 그 당시에는 회례악으로 사용되었고, 세조 때 이르러서 종묘제례악으로 사용되었다. 세종 때의 보태평(文德)은 11곡, 정대업(武功)은 15곡이었는데, 세조 때에 이르러 보태평 11곡, 정대업 11곡으로 고정되었다.
종묘제례악은 무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