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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청년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적 혁명을 이루어냈던 미국의 청년문화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어야 한다.

 

미국의 teenager에 의한 어떤 새로운 문화적 세대 혁명이 있었다면 이 문화적 혁명은 64년 비틀즈(The Beatles)의 성공을 기점으로 전 세계에 전파가 된다. 그리고 재미있는 점은 바로 그 1964년 비틀즈가 전 세계의 젊은이들이여 단결하라라고 새로운 메시지를 전파하는 순간에, 한국에서도 새로운 매체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964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음악 전문 미디어라고 할 수 있는 FM Radio방송이 그 때 시작되었다.

이때부터 한국에서도 입시과열의 분위기가 시작되었는데, 심야 FM Radio Channel을 들으면서 밤에 공부하는 문화. 그리고 공부하는 틈틈이 너무 지겨우니까, 신청곡엽서(Request postcard)를 보내는 문화가 이 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그러면 이 때 FM Radio에서는 어떤 곡을 틀어주었느냐? 전부 다 비틀즈, 밥 딜런, 이런 음악들을 틀어 주었다. 지금은 라디오를 들으면 약 95% 이상이 우리나라 노래이지만, 그 당시에는 AM 12시에 하는 싱글벙글 쇼말고는 FM에서 한국 노래를 트는 순간, 통칭 가요라고 하는 한국어 대중음악을 튼다는 것은, 당시 FM PD에게는 금기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청취율의 하락을 의미하는 것이니까.

바로 그 시대 60-70년대 사이의 대한민국은 1,2,3차 경제개발5개년의 시대,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제3공화국과, 4공화국의 시대에 한국에서도 새로운 문화적 세대혁명이 역사상 최초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그 새로운 세대혁명의 이름은, 그 당시 언론이 표현한 바에 따르면, ‘청년문화라고 불렀다. 드디어 이제 젊은이들의 시대가 젊은이들의 문화가 처음으로 한국사회의 지평선에서 떠 올랐다.

 

다시 1960년대의 미국으로 돌아가서 밥 딜런(Bob Dylan)으로 대표되는 모던포크(Modern folk)는  민중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음악으로 리듬보다는 가사가 중요했고 체제 저항적인 경향을 많이 보였는데, 밥 딜런의 노래의 경우에는 가사가 문학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어쿠스틱한 악기들을 많이 사용했고 전통 민요를 리메이크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굉장히 지적인 음악이면서 음악적으로는 너무 단조로웠기에 비틀즈같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지는 못해서, 밥 딜런도 한번도 빌보드 차트 1위를 하지 못했다.

반면에, 락앤롤의 경우에는 가사보다는 그냥 리듬을 느끼는게 중요해서 롤링스톤즈(Rolling Stones)의 경우에는 일부러 가사를 못알아듣게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비틀즈는 이런 밥 딜런을 동경했고, 밥 딜런도 비틀즈의 인기를 부러워했기에 1965년 이후에는 비틀즈에서 밥 딜런의 흔적을 밥 딜런에서 비틀즈의 흔적을 느낄 수 있게 된다고 한다.

비틀즈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단발로 데뷔했던 모습을 버리고 점차 장발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밥 딜런은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기타를 들고 콘서트에 등장하기도 한다. 당시, 장발은 자본주의적인 삶인 9 - 5 (9시 출근해서 5시 퇴근하는) 직장인의 스탠다드를 벗어나는 표현이었다. 미국 락앤롤은 이후 히피문화와 결합하여 펑크와 메탈등으로 넘어가면서 좀 더 공격적인 성향이 띠게 된다.

 

다시 한국의 상황으로 돌아와보자. 청년문화를 이끌어간 세대는 45년 이후 출생했고, 10대에 이승만을 붕괴시킨 4.19세대이다. 4.19는 중고등학생들이 시작한 시위였다일제시대의 교육을 받지 않았던 당시 10대들은 불합리한 현실을 참지 못하고 교실을 박차고 나갔고, 봉건주의 군주였던 이승만을 몰아냈던 경험을 가진 세대였다. 그들이 성장해서 어느새 20대가 되었고, 그들은 이번에는 청년문화를 불러일으키는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대중적으로 포크음악을 전면에 끌어 올린 전설적인 듀오, 트윈폴리오(송창식&윤형주)

라디오를 통해 대중적 인기를 얻기 시작한 이들은 감미롭고 싱그러운 목소리에 통기타를 들고 안경을 쓴 대학생 엘리트 이미지로 데뷔한다. 이들의 특징은 앨범의 전곡이 번악곡이였다는 것이다.

당시만 해도 저작권의 개념도 별로 없었기에 작곡의 필요성을 못 느끼던 시절이였다노래는 그냥 잘부르면 되는 것에 머물던 시기였기에, 혜성과 같이 나타나 단 한장의 앨범을 내고 196912월 해체한 이들에게는 작곡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한대수

그는 중학교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지만, 아버지가 실종되는 바람에 어렵게 자랐고, 60년대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고 한국에 돌아와 코리안헤럴드 사진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69년 9월19일 남산드라마센터에서 한대수는 400명이 안되는 작은 공연장에서 자작곡을 발표하고, 1974년 첫 앨범을 발표하는데, 첫 앨범이 발표되기 그 이전에도 이미 한대수의 음악은 암암리에 청년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고 한다.  본격적인 자작곡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반면 한편에서는 그룹사운드의 흐름이 형성되고 있었다. 1960년대의 경제 상황에서는 사실 개발도상국에서는 록앤롤은 너무나 고급스러운 음악이였다. 악기와 음향 시스템에서 도저히 따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락밴드가 생길 수 있는 곳은 바로 미8군 근처 술집이였다.

미군 장교들이 가서 맥주먹는 고급 술집에서는 락밴드가 생겨나가 시작했고 1962년 최초의 락밴드 키보이즈가 생겨난다초창기 비틀즈의 노래를 번안해서 부르던 이들은 계속해서 맴버구성을 바꿔나가다가 3기였던 1969'해변으로 가요'를 대성공시키게 된다. 하지만, '해변으로가요' 역시 일본 노래를 카피한 노래였기에, 키보이즈도 자작곡으로 성공한 그룹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8군을 주름잡던 기타리스트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한국 락음악의 대부라고 불리는 중졸 출신의 신중현이였다.

 

1964년 애드훠 라는 그룹으로 데뷔를 했고, 빗속의 연인, 내 속을 태우는구려(커피한잔)라는 노래를 냈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까지는 이미자의 시대(기성세대의 문화)였기에 그냥 나오자마자 망했다고 한다. (빗속의 연인과 커피한잔은 이후 리메이크되어서 대히트를 하게 된다.) 8군을 벗어날 수 없었던 신중현은 어쩔 수 없이 월남행을 선택한다. 하지만8군에서 같이 활동했던 후배들에게 준 곡이 대박을 내면서 그는 월남행을 포기한다. 그들이 바로 펄시스터즈였고, 이후 김추자-장현-김정미-바니걸스-임성훈-박인수로 이어지며 연속해서 대히트를 치면서 이른바 신중현사단이 만들어지게 된다. 특이한 한점은 솔로로 데뷔한 이들은 사실상 락음악을 한 것이 아니라 소울 음악을 했다는 점이다. 8군에서 활동했던 신중현은 흑인음악이였던 소울과 락앤롤을 동시에 경험했었고, 소울 음악을 기반으로 솔로 가수들을 데뷔시켰던 것이다. 1968- 1973 프로듀서로써 신중현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지만, 자신이 참가한 락밴드는 계속해서 실패를 거듭하게 된다.
당시만 해도 락음악을 할 수 있는 인프라도 부족했고, 교육시설이나 음향시설도 없었고 나이트클럽에서 공연만 가능했던 시절이다. 아무,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이미자가 점령하던 트로트 전성시대는 점차 막을 내리고, 포크 음악이 새로운 대세로 떠올랐고 패티김 같은 가수가 등장하면서 트렌드를 또 바뀌게 된다. 여기에 한대수, 신중현 등의 영향으로 자작곡이 창작되면서 역사적인 포크 음악이 등장하게 된다.

 

그 주인공은 바로 1971630일 발매된 3000장도 팔리지 않은 양희은의 음반 <아침이슬이다.  이 노래에 담긴 스토리는 너무나 재미있다. 19711021일 발매된 김민기의 앨범에도 실려있는 이 곡은 너무나 느낌이 다르다.

아침이슬을 작사,작곡한 이는 서울대 미대생이였던 김민기였는데, 그는 열심히 알바를 하면서 학교를 다녔던 고학생이였고, 사는게 너무 괴로워서 술먹다가 통금에 걸려 그냥 구석에 쭈그려 잤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아침에 일어났는데 그곳이 바로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그가 눈을 떴을 때 이미 태양은 떠오르고 있었고 한낮의 찌는 더위 속에서 그는 다시 일하러 갔다고 한다. 작사한 김민기의 사연을 듣고나면 참으로 고달픈 눈물나는 슬픈 노래이다. 민주항쟁을 상징하는 노래가 아니라, 21세기 88만원 세대를 대표하는 노래인 것이다. 하지만, 이 노래가 서강대 사학과 1학년생이였던 양희은을 만나면서 완전 새로운 노래가 되어버린다. 여성보컬 특유의 비브라토도 없고, 감성적이면서도 투쟁적인 목소리를 만나면서 민주항쟁의 상징적인 노래가 된다.

음악적인 아마추어였던 미대생 김민기는 굉장히 한국적인 새로운 시도를 했었다는 것이다. 통기타와 클래식기타만으로 연주한 이 노래는 분명히 C장조임에도 불구하고 목가적이고 여성적인 아름다움으로 시작해서, 갑자기 남성조의 선동적인 분위기로 바뀌어버린다. 당시에 유행하던 A-B-A 정형적인 환전문법을 벗어나서 A-B-C로 점점 고조되는 새로운 문법으로 노래가 구성되면서 아름다운 A테마가 다시 나와 현실로 돌아가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떠나면서 노래가 끝난다.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 않는 낭만주의적인 노래, 여기에 한문과 외래어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가사는 당시 저항 시인이였던 김지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라고 한다.

김민기의 새로운 시도는 뒤늦게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아름다운 가사라고 상까지 받았지만 시대를 이끌어 나가는 진취적인 노래가 되어버린다. 

이 노래는 시위대가 자주부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유신시대를 거쳐서 아무런 사유도 없이 금지곡이 되어버렸고,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머물다가 19876월항쟁에서 상징적으로 터져나오게 된다. 

 

1973년에 들어서는 대학 캠퍼스 스타(김세환, 이수만, 이장희, 양희은 등)가 등장했고, 얼굴까지 잘생겼던 김세환은 대중 가요계를 완벽하게 점령해버린다. 1974년 영화<별들의 고향>이 등장하면서 청년문화는 주류가 되어버린다. 1960년대 영화계를 주름잡던 신상옥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이장호 감독은 당시 20대였던 최인호 작가의 원작 소설을 가지고 만든 영화로 홍익대 대학생 이장희가 만든 OST도 대히트를 거두게 된다. <별들의 고향>은 대중문화에 새로운 시대를 확정짓는 신호탄이였고, 이어서 1975<바보들의 행진> 역시 송창식의 OST로 대세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여기서 그룹사운드의 대표주자였던 신중현이 가세한다. 이미 수많은 밴드의 실패를 경험했던 신중현은 진짜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처음으로 밴드이름을 한글로 짓는다. 근데 밴드이름이 심상치 않다. 한국민족을 비하해서 부르던 말인 '엽전들'

진짜 마지막이라고 작정이라고 한듯 노래들도 굉장히 실험적이다. 그리고 항상 풀 밴드를 구성하던 신중현은 기타/베이스/드럼의 3인조로 최소 규모로 밴드를 구성했고, 항상 당대 최고의 보컬을 영입해서 기타만 연주하던 자신이 이번에는 직접 보컬을 맏는다. 

1974년 발표된 <미인> 삼천만의 애청곡이 되어버리고, 신중현은 이 앨범으로 한국 락음악의 대부의 칭호를 받게 된다. 그동안 비틀즈를 따라만하던 그가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만들어낸 것이다.

 

 

서울대 미대생이였던 김민기가 아마추어적으로 시대에 저항하는 노래를 만들어냈다면, 중졸 출신의 신중현은 프로패셔널하게 일본음악과 미국음악이 아닌 한국적인 음악으로 시대에 저항했다는 것이다. 

 

1973년 오일쇼크 이후 박정희 정권을 지탱하던 경제성장이라는 기반이 흔들리면서, 박정희는 긴급조치를 발휘하면서 철군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19754월 긴급조치 9호가 발표되었고, 박정희는 자신이 작사/작곡한 국민가요들을 전파하기 시작한다. <잘살아보세>, <나의 조국> 일본군가에서 기본 리듬을 따온 이 노래들은 일제시대 사이토 총독이 사용한 국민가요라는 명칭을 그대로 쓰다가 뒤늦게 건전가요라는 이름으로 변경해서 대중들에게 전파된다.

아무튼, 이러한 국가의 움직임에 협조하지 않았던 신중현은 완전 활동이 통제되어버리고 197512월에는 대마초 파동으로 잡혀들어가게 된다. 당시 법률상 대마초는 불법이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박정희는 일단 구속하고 관련 법률을 만드는 형태로 비협조적인 가수들을 잡아들인 것이다.

 

이를 계기로 락밴드는 다시금 사라지게 되고, 락밴드 출신의 트로트 가수들이 다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조용필, 윤수일 등)

하지만, 1977년 대학가요제가 생기면서 대학가 락밴드가 대중으로 다시금 나오는 계기가 되는데, 대표주자가 바로 <산울림>이였다. 신중현 이후 처음으로 전곡이 자작곡인 앨범을 냈고, 이후 3개 앨범을 한 번에 쏟아내면서 락밴드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어버린다. 1978년 산울림의 등장 이후 송골매 등의 락밴드가 다시 등장하는 것이다.

 

80년대로 넘어와서 경제발전으로 용돈도 생기고, 워크맨의 등장으로 음악도 자유롭게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도 가부장적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순정만화의 전성시대에 맞춰서 감미로운 발라드 전성시대가 된다. 그런, 가장 큰 특징은  조용필 - 이문세 - 변진섭으로 이어지는

노래는 잘하는데잘생기지 않은 가수가 부르는 비련의 슬픈 사랑이야기가 대세를 이룬다는 것이다. (가사도 이해하기 힘든 아주 심오하고 어려운 표현들이 넘쳐난다.)

아직까지 대놓고 잘생긴 가수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인 시각이 너무나 부담스러웠기에 생긴 현상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1988년 이후 X세대로 넘어가게 되면서 그 흐름이 바뀌게 되는데, 1989년의 <희망사항>이라는 노래는 그 흐름을 대변해주는 대표적인 노래라는 것이다. 운문에서 산문으로 가사가 바뀌었고, 관념적인 표현에서 사실적인 표현으로 TV시대에 맞춰서 비주얼적인 표현들이 등장하면서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는 노래가 등장하게 된것이다.

1990년대부터는 10대 문화가 드디어 완성되었으며이것이 오늘날 K-pop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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